이에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중에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하던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의 옷 가에 손을 대니 혈루증이 즉시 그쳤더라...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말하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선생님을 더 괴롭게 하지 마소서 하거늘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시고 그 집에 이르러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아이의 부모 외에는 함께 들어가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 모든 사람이 아이를 위하여 울며 통곡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누가복음 8:41~56)

소극적 거룩과 적극적 거룩

혈루병과 혈우병

혈우병

혹시나 사람들이 햇갈리는 것이 혈우병과 혈루병은 다른 병입니다. 이게 이름이 비슷해서 사람들이 착각하는데요. 우선 이걸 좀 더 정확하게 알 필요가 있어요. 그래야 혹시라도 생길 오해를 막을 수 있으니까요.

우선 혈우병은 여자는 걸리지 않습니다. 이게 염색체를 통해 전해지는 병이거든요. 우선 이 혈우병이라는 게 뭐냐 하면요, 혈액 속에 피를 응고시키는 인자가 부족해서 피가 잘 멈추지 않는 질병입니다. 쉽게 말하면 지혈이 안 되는 거에요. 그래서 한 번 다치면 그게 큰 상처는 아닌데, 이게 심각한 문제가 되는 거죠. 피가 안 멈추니까, 이게 무슨 상황이든 심각해지는 겁니다. 문제는 이게 근본적인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한 번 걸리면 죽을 때까지 조심하는 것 외에는 거의 방법이 없습니다. 지혈이 되도록 돕는 약들이 없지는 않지만, 이게 워낙 고가인지라 도움을 받기가 쉽지 않거든요.

그런데 이게 여자는 걸리지 않는다고 했잖아요? 왜 그러냐 하면, 이건 생물학적 설명이 조금 필요한데요, 이게 제 전공분야는 아니어서 혹시나 잘못되었다면 제게 이야기해주셔도 좋겠습니다. 자 우선, 예전 생물시간에 배우셨을텐데요, 남자와 여자는 각각의 염색체를 갖고 있죠. 남자는 XY, 여자는 XX 염색체를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혈우병은 X염색체에만 존재해요. 그러니까 여자는 X염색체가 두 개라서 하나가 문제가 생겨도, 다른 하나의 X염색체가 대체를 해줄 수가 있어요. 그런데 남자는 X염색체가 하나라서 여기에 문제가 생기면, 대책이 없는 거죠. 그래서 혈우병은 남자에게 주로 발병하게 되어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자도 아주 완전히 방법이 없지는 않아요. 혈우병 남자와 문제가 있는 염색체를 가진 여자가 결혼했을 때, 가능성이 있긴 하죠. 그러나 남자만큼 많을 수는 없는 거죠. 그래서 혈우병은 거의 남성의 병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혈루병

그럼 혈루병은 무엇일까요? 이건 쉽게 말해서 여성의 그날이 시도 때도 없이 계속되는 병입니다. 그런 것도 있어요? 라고 이야기하실지 모르겠지만, 그런 병이 있답니다. 그래서 이건 여자만 걸리는 병인거에요. 둘 다 피에 관련된 거고, 피가 흐르는 병인 것은 맞는데, 완전히 그 이유가 다르고, 그 병에 걸리는 성별도 다르죠. 그러니까 이 두 병을 햇갈리시면 안 됩니다.
그런데 이 혈루병이 왜 문제일까요? 그냥 그날이 긴 것 아닌가요? 우선 이게 병리학적으로 보면 말이죠. 이것 저것 복잡한 것 다 떼고, 이게 요즘 이야기하는 암일 가능성이 있다고 해요. 무척 심각한 병이라는 거죠. 그런데 이런 경우는 12년이나 살 수가 없다고 보기 때문에 오늘 본문의 여자가 이럴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보더라구요. 다만 불규칙한 배란, 그리고 그로 인한 신체 리듬의 변화 등 자궁근종이나 다낭성 난소증후군으로 보더라구요.

왜 혈루병이 문제인가?

혈루병이 가진 부정함

오늘 이야기는 혈루병 걸린 여인과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려주신 이야기입니다. 우선 이 두 이야기 중에 혈루병 여인의 상황부터 확인해보도록 하죠.

율법은 기본적으로 여성의 생리에 대해 부정한 것으로 보고 있다고 할 수 있어요. 율법은 기본적으로 이 기간 동안은 일상생활로부터 격리되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죠.

어떤 여인이 유출을 하되 그의 몸에 그의 유출이 피이면 이레 동안 불결하니 **그를 만지는 자마다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요 (레위기 15:19)

문제는 이게 단지 자기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생리 기간에 있는 여자를 만지면 만진 사람도 부정해져요. 이 여인이 앉은 자리도 부정하구요, 손을 댄 모든 물건도 부정해집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요? 움직이지 못하고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거에요. 왜냐하면 움직이면서 자신에게 닿는 모든 것을 부정하게 만드니까요.

쉽게 말하면 마이다스왕의 또 다른 변형이라고 할까요? 마이다스 왕은 자신의 손에 닿는 것을 금으로 만들었다면, 월경 기간의 여인은 손에 닿는 모든 것을 부정하게 만드는 능력이 생기는 거죠.

그러면 얼마나 떨어져 있어야 했을까요? 보통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했구요, 그리고 월경이 끝나고 일주일 더 격리되었던 것 같아요.

그의 유출이 그치면 **이레를 센 후에야** 정하리니 (레위기 15:26)

그러니까 보통 생각해보면, 월경하느라 한 주, 끝나고 또 한 주, 최소한 두 주간은 부정한 상태로 있어야 했다는 말이 되죠. 이게요, 바라보기에 따라 다른데요,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이 때는 여성 인권이 더 좋았던 게 아닌가 싶기도 해요. 지금 있는 생리휴가가 이 당시에 있었던 거잖아요? 그렇게 보면 생리휴가가 성서적인 것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을 듯 해요.

다만 이게 여성의 인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게 문제일 뿐이죠. 당시의 관점으로 볼 때, 지금도 그런 생각이 없지 않지만, 여성의 생리에 대해서 부정적이고, 불결한 것으로 이해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이에 대한 율법은 꽤 오랫동안 그대로 남아있던 것으로 봅니다. 왜냐하면 에스겔 18장에도 이와 연결된 내용이 나오거든요.

산 위에서 제물을 먹지 아니하며 이스라엘 족속의 우상에게 눈을 들지 아니하며 이웃의 아내를 더럽히지 아니하며 **월경 중에 있는 여인**을 가까이 하지 아니하며 (에스겔 18:6)

하지만 생각해보면, 이게 뭐 좋은 것도 아닙니다. 내가 하기 싫은 것으로부터는 떨어져도 되지만, 하고 싶은 일로부터도 떨어져야 하잖아요.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잖아요. 그냥 혼자 격리되어 있는 게 좋아봤자 뭐가 좋겠어요? 이게 얼마나 심했는지 아세요? 레위기 15장 20절에서 24절입니다. 한 번 보세요.

그가 불결할 동안에는 그가 누웠던 자리도 다 부정하며 그가 앉았던 자리도 다 부정한즉 그의 침상을 만지는 자는 다 그의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요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며 그가 앉은 자리를 만지는 자도 다 그들의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요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며 그의 침상 위에나 그가 앉은 자리 위에 있는 것을 만지는 모든 자도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며 누구든지 이 여인과 동침하여 그의 불결함에 전염되면 이레 동안 부정할 것이라 그가 눕는 침상은 다 부정하니라 (레위기 15:20~24)

아무리 좋아도, 이렇게 격리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꺼에요. 그런데 문제는 이 혈루병은 시도 때도 없이 그날이 된다는 겁니다. 이게 물론 주기적으로 오는 월경은 아닐 수도 있어요. 생리불순으로 오는 문제일수도 있지만, 말씀드린 것처럼 그 자체가 병일 수도 있거든요. 그런데 어쨌거나 그건 의미가 없어요. 중요한 것은 유출이 있다는 거죠. 그리고 그게 지속되는 동안은 부정하다는 거에요.

만일 여인의 피의 유출이 그의 불결기가 아닌데도 여러 날이 간다든지 그 유출이 그의 **불결기를 지나도 계속되면** 그 부정을 유출하는 모든 날 동안은 그 불결한 때와 같이 부정한즉 (레위기 15:25)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거에요? 움직일 수가 없는 거에요. 일상생활이 안 되는 거에요. 아니 일상생활의 문제가 아니라 생활 자체가 안 되는 거에요. 어디를 갈 수도 없어요. 누구를 만날 수도 없어요. 심지어 집에 있는 집기 하나 제대로 만질 수가 없어요. 왜요? 내가 만졌던 것 다른 누구라도 만지면, 그 사람도 부정해지잖아요.

열두 해 혈루증을 앓았다는 것

그러고 나서 생각해보니까 지금 코로나랑 비슷한 부분이 있어요. 내가 걸리면요, 나는 격리되어야 하는 거에요. 뭘 만지지도 못하고, 이야기도 못하고, 딱 격리되어야 하는 거죠. 누구에게라도 내가 전염시킬 수 있잖아요. 이 당시, 혈루증 가진 여인이 그랬다는 겁니다.
완전 격리에요. 완전 분리에요. 그게 한 한 주, 길어야 두 주라면 그래도 버틸 수 있어요. 그런데 이게 기약이 없어요. 그렇게 한 해, 두 해, 그리고 이제는 열 두 해가 지나갔다구요. 이 여자의 삶이 어땠을까요?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마가복음 5:26)

희망 없음. 이게 이 여인의 모습이 아니었을까요? “많은 의사에게 진찰을 받았고”가 아니에요.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대요. 그러면서 가진 재산도 다 써버렸어요. 문제는 그러고 낫기라도 했으면 좋은데, 낫지 않는 게 문제가 아니라 더 심해졌대요. 이건 점입가경이고, 설상가상이죠.

그런데 이 여인이 사람들 사이로 들어왔다구요. 이건요, 이 당시에는 돌로 맞아죽어도 아무 말 못하는 상황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모든 사람들을 부정하게 만드는 행동이잖아요.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해악을 끼치는 행위라구요. 지금 이 여자는 미친 짓 하고 있는 거에요. 물론 정말 애타는 마음은 이해가 가죠. 예수님이라도 만나면 어떻게 되지 않을까 하는, 그 간절한 마음, 그 간절한 믿음은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그래도 이건 아니죠. 요즘 노래대로 하면, 니가 왜 거기서 나와, 이거죠.

그리고 예수님은 이 여인을 고쳐주십니다. 이 고쳐주신다는 의미가 뭐에요? 이 여인을 정결하게 변화시켜 주셨다는 거에요.

본문의 구성

액자구조

오늘 이 혈루증 여인의 이야기는 또 한 이야기와 맞물려 있습니다. 액자 구조라고 하죠? 액자라는게 그림이 있고, 그 그림을 싸고 있는 액자가 있잖아요? 오늘 이야기가 그렇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야기 속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죠. 예를 들자면, 소설 속에서 주인공이 자신의 이야기를 서술하는 거에요. 주인공이 자서전을 적는다던지, 혹은 소설 속에 등장인물이 자신이 경험한 이야기를 풀어놓는 거죠.
원래 문학적으로는 이 액자구조를 왜 쓰냐 하면, 안쪽 이야기의 진실성을 더할 때 이런 방법을 사용합니다. 뭐 암튼 그렇대요. 지금이 문학시간은 아니니까 그냥 이렇게만 아시면 됩니다. 어차피 우리가 중요한 건 이게 아니거든요. 성경이 이런 액자구조를 갖기는 하지만, 그걸 이런 문학적 정의로 이해할 수는 없거든요.

성경에서 이런 액자구조가 많이 나오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자면, 예수님께 향유 부은 여인 이야기에 죄를 용서받은 사람의 감사에 대한 비유가 들어 있다던지, 아니면 가장 중요한 율법을 묻는 질문에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말씀하시는 것을 들 수 있어요. 그리고 성경이 이런 구조를 사용하는 것은 두 이야기가 같은 주제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두 사건이 “**같이**” 일어난 것으로 이야기하면서 두 개가 같은 주제를 갖고 있음을 보여주는 겁니다.

열두 살 여자아이의 이야기

그럼 오늘 이야기에서 안쪽 이야기가 열두 해 혈루증을 앓은 여인이라고 하면, 바깥쪽 이야기는 무엇일까요? 바로 열두 살 딸을 위해 예수님께 나온 야이로의 이야기입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열두 살 된 딸이 죽어갑니다. 회당장이 급하게 에수님을 찾아오죠. 그리고 자신의 딸을 고쳐달라고 간구해요.

이에 회당장인 야이로라 하는 사람이 와서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려 자기 집에 오시기를 간구하니 (누가복음 8:51)

그리고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집으로 가는 길에 앞에서 살펴본 사건이 발생했죠. 문제는 말이에요. 안그래도 야이로의 딸이 죽어간다고 했는데, 이 사건때문에 사단이 난 거에요. 딸이 죽었어요.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말하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선생님을 더 괴롭게 하지 마소서 하거늘 (누가복음 8:49)

야이로로서는 환장할 노릇 아니겠어요? 안그래도 바쁜데, 빨리 갔으면 살릴 수도 있었을텐데, 저런 말도 안 되는 여자때문에 내 딸이 죽었다구요.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이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시는 거에요.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시고 (누가복음 8:50)

그리고 우리가 아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야이로의 딸을 죽음으로부터 일으켜 주십니다.

두 개의 공통점?

자, 이 사건에서 흥미로운 공통점이 몇 개 있는데요. 그 중에 하나가 둘 다 열두 해에요. 아이도 열두 살이고, 여인이 아픈 것도 열두 해에요. 그러니까 아이가 태어날 때부터 이 여인은 아팠어요. 아이의 성장과 함께 여인의 상황은 악화된거죠. 뭐 물론 이걸 가지고 여러가지 알레고리로 해석하시는 분들도 계시던데, 저는 그 정도 상상력까지는 좀 어렵구요. 그것보다는 조금 더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오늘 예수님이 얼마나 말이 안 되는 행동을 하셨나 하는 거에요. 자 우선, 열두 해 혈루증 앓은 여인의 상황은 앞에서 쭈욱 확인해봤으니까 야이로의 딸의 상황을 좀 보죠.

시체는 부정하다

율법에 말이에요, 절대 손대면 안 되는 것 중에 하나가 시체입니다. 죽은 시체는 절대 손대먼 안 되는 것 중에 하나였어요. 완벽하게 부정한 것 중에 하나가 시체였다는 거죠. 그래서 율법은 절대 시체에 손을 대지 못하게 했습니다.

사람의 **시체를 만진 자**는 이레 동안 부정하리니 (민수기 19:11)

그리고 이 시체에 대해 얼마나 심각하게 생각했는지 만약에 이 부정함을 씻지 않으면, 이스라엘 민족 중에서 쫓겨난다고까지 이야기합니다.

누구든지 죽은 사람의 시체를 만지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지 아니하는 자는 **여호와의 성막을 더럽힘**이라 **그가 이스라엘에서 끊어질 것**은 정결하게 하는 물을 그에게 뿌리지 아니하므로 깨끗하게 되지 못하고 그 부정함이 그대로 있음이니라 (민수기 19:13)

그래서 우리가 아는 것처럼 제사장이 되면, 자신의 가족 외에는 장례식에 참석조차 할 수 없었구요, 대제사장이 되면 부모님의 장례식마저도 참석할 수 없었어요.

자기의 형제 중 관유로 부음을 받고 위임되어 그 예복을 입은 대제사장은 그의 머리를 풀지 말며 그의 옷을 찢지 말며 어떤 시체에든지 가까이 하지 말지니 **그의 부모로 말미암아서도 더러워지게 하지 말며** 그 성소에서 나오지 말며 그의 하나님의 성소를 속되게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께서 성별하신 관유가 그 위에 있음이니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레위기 21:11~13)

부모의 시신이지만, 그조차도 더러워지면 안 된다는 거에요. 시체라는 것이 그만큼 율법에서 부정한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다는 거죠. 그만큼 율법은 이 시체와의 접촉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어요. 그래서 율법은 단순히 시체만이 아니라 무덤까지도 부정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누구든지 들에서 칼에 죽은 자나 시체나 사람의 뼈나 **무덤을 만졌으면** 이레 동안 부정하리니 (민수기 19:16)

그럼 왜 율법을 이렇게까지 시체에 대해서 부정하게 생각했을까요? 사람들에 따라서는 당시 사회구조로 봤을 때, 전염병이나 여타의 질병에 대한 주의가 아니었을까 생각하기도 합니다.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르고, 왜 죽었는지도 모르는데, 괜히 손대었다가 나쁜 전염병이라도 옮으면 안 된다는 거죠. 이것도 충분히 설득력 있는 이유라고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코로나 하나로 이렇게 힘들어하는데, 당시라면 정말 큰 일이 일어날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꼭 그런 현실적인 이유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도 있어요.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완성인 생명과 가장 대비되는 모습으로서 죽음을 이해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생명을 창조하셨잖아요?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죽음은 죄의 결과잖아요? 그러니까 시체라는 건 죽음이 남긴 흔적인거구요, 그 시체를 남긴 죽음은 죄의 결과니까, 하나님은 죄와 함께할 수 없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은 죽음, 그리고 그 죽음이 가장 구체화되어 현실적으로 나타난 시체에 대해 부정한 것으로 이야기했다는 거죠. 그러니까 시체에 대한 거부감은 시체 자체에 대한 거부감이라기 보다는, 시체가 보여주는 죄에 대한 신앙적 부정함으로 해석해볼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는 시체에 대한 부정함과 세상이 생각하는 시체에 대한 거부감은 구분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예수님이 부정한 행동을 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야이로의 딸에게 하신 예수님의 행동은 절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인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죽은 사람에게 손을 대셨잖아요?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불러 이르시되 아이야 일어나라 하시니 (누가복음 8:54)

지금 예수님은 율법을 완전히 부정하고 계신 거에요. 왜냐하면 손을 대시면 안 되잖아요. 손을 대면 어떻게 된다구요? 최소한 일주일은 부정해요. 부정해서 일주일동안 모든 삶의 자리에서 제외되어야 해요. 격리되어야 합니다. 그게 율법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 상황 자체를 바꾸어 버리신 거에요. 예수님은 죽은 사람에게 손대신 게 아니에요. 예수님은 살아있는 사람에게 손을 대셨다는 거에요. 예수님은 율법을 어기지 않으셨어요. 이 아이는 죽지 않았거든요. 그렇죠? 죽지 않았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하셨죠.

모든 사림이 아이를 위하여 울며 통곡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누가복음 8:52)

율법이 말하는 정결과 부정

이 부분이 조금 어렵지만, 오늘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니까 잘 들으셔야 해요. 제가 조금 전에 이야기한 것처럼, 부정함과 거부감은 구분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부정함과 나쁨과 구분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줘요. 무슨 이야기냐 하면요. 율법이 이야기하는 부정함과 정결함은 내가 구원받고, 못 받고의 의미는 아니라는 거에요. 내가 부정하면 구원받지 못하는 거에요? 아니에요. 이스라엘 민족도 부정해질 수 있잖아요? 지금 이야기에서 나오잖아요?

그러니까 이걸 쉽게 말하면, 이런 거에요. 아이에게 깨끗한 옷을 입혀서 내보냈어요. 그런데 밖에 나가서 놀다보니까 먼지도 묻고, 뭘 얻어먹다 그랬는지 옷에 음식도 묻히고, 진흙탕에서 놀았는지 흙도 튀고, 더러워져서 온 거에요. 그러면 엄마가 어떻게 해요? 첫 번째는 혼내죠. 깨끗하게 놀지 지저분하게 놀았다구요. 근데 뭐 그게 가능해요? 불가능해요. 놀다보면 더러워지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그 다음에 어떻게 해요? 옷 다 벗겨서 빨래하고, 목욕탕에 넣어서 샤워를 시키죠. 그러면 또 깨끗해집니다. 세상에서 가장 이쁜 내 자식이 되죠. 그쵸?

성경의 부정함은 이런 개념이라고 봐야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도 부정해질 수 있어요. 이 세상 살다보면 부정한 것과 가까워질 때가 있어요. 내가 그 부정함이 묻을 수 있어요. 그래서 그 부정함을 씻어낼 수 있는 방법을 하나님께서 허락해주신 거에요. 그 부정함을 계속 묻히고 살 수 없으니, 그것을 씻어내라는 거죠. 다만 그것을 계속 씻어내지 않고 살아간다면, 그건 다른 문제죠. 그러나 기본적으로 율법이 이야기하는 부정함은 씻어내야 하는 거고, 그것을 어떻게 씻어낼 수 있는지 말하고 있지, 부정함 자체가 다 잘못되었다, 그것이 다 문제다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말이에요. 이게 어쨌거나 부정해지면, 격리가 되고, 혼나잖아요. 그냥 넘어가지 않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부정함이라는 게 잘못됨, 어긋남이라는 의미가 되는 거에요. 부정한 건 나쁜 게 되어버린다구요. 그래서 부정한 건 거부감이 드는 거에요. 그래서 부정한 사람은 나쁜 사람이 되어버렸다구요.

그래서 부정한 사람은 더 이상 함께 어울리면 안 되고, 함께 관계맺으면 안 되는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저 멀리 떨어뜨려놔야 하는 사람이 되어 버렸어요. 부정한 사람들과는 더 이상 어울리면 안 되니까, 선을 그어놓고 넘어오지 못하게 한 거에요. 그래서 세리와 죄인들은 절대 어울리면 안 되는 사람들이 되어버렸고, 율법을 지키지 않는 부정한 사람들은 더 이상 함께하면 안 되는 사람들이 되어 버린 거에요.

예수님의 정결과 부정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오늘 이 두 사건을 통해 말씀하시는 주제는 분명합니다. 예수님이, 그리고 누가가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그리고 마태, 마가, 누가복음이 이 두 사건을 꼭 함께 기록한 이유가 분명해요. 두 사건이 보여주는 것이 동일하다는 겁니다.

지금까지 율법을 지켰던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정결을 위해서 부정한 것으로부터 떨어져야 했어요. 구분짓는 거에요. 분리하는 거죠. 따로 떼어놓는 겁니다. 이것을 우리는 뭐라고 불렀어요? 네. 바로 거룩이라고 불렀어요. 이 거룩이라는 말이 갖는 가장 첫번째 의미가 분리거든요. 구분하는 거에요. 떨어뜨리는 거에요. 왜냐하면 따로 떼어놓지 않으면, 부정해질 수 있거든요. 혹시라도 때가 탈 수 있구요, 의도하지 않게 부정한 것과 접촉할 수 있는 거에요.

이건 단지 신앙의 이야기만이 아니죠. 아이들이 더러운 것 만지려고 하면, 우리는 못 만지게 해요.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는 가지 않아야죠. 괜히 휩쓸려 돌아다니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물들어요. 그래서 우리가 좋아하는 시편 1편이 나온 겁니다.

복 있는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시편 1:1)

악인으로부터 떨어져야 해요. 죄인으로부터 분리되어야 합니다. 오만한 자의 자리에 가서는 안 되요. 왜냐하면 그것들과 접촉하면 내 거룩함이 손상되니까요. 그래서 율법이 이야기했던 정결함은 수동적이었습니다. 방어적이에요. 보호하고, 지키는, 그래서 소극적인 모습으로 정결함을 지켜야 했어요. 나쁜 놈들이 다 뛰어다니고, 선하고 착한 나는 한쪽 구석에 조용히 앉아 있는 범생이의 모습이었던 거에요.

그런데 예수님은 오늘 두 사건을 통해서 더 이상 이런 구분이 의미없다고 선포하신 겁니다. 부정한 것으로부터 나를 수동적으로 보호하고 지키는 것이 정결함을 유지하는 방법이 아니라는 거에요. 더 이상 그렇게 소극적으로 구석에 앉아있지 않아도 된다는 겁니다. 왜요? 예수님은 부정한 것을 자신이 손대어서 정결한 것으로 바꿔버리셨거든요. 더 이상 부정한 것이 부정하지 않아요. 부정한 것이 정결하게 바뀌는 거에요. 그러니까 내가 부정한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에요. 내가 부정해질까봐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에요. 왜요? 정결함의 힘이 부정함의 힘보다 더 쎄진 거에요.

그래서 예수님은 율법을 살아낸다는 것이 얼마나 힘있고, 능력있는 것인지 보여주신 거에요. 그 개념을 뒤바꾸어 버리신 겁니다. 예수님은 정결함을 지키는 방법을 바꿔버리신 거에요. 소극적이지 않아요. 적극적이에요. 내가 그 부정함 한 가운데로 들어가, 그곳을 정결하게 바꾸는 거에요. 나를 보호하는 게 아니에요. 부정한 자들이 나를 만질 수 있도록 내어주는 겁니다. 그들이 나를 통해 정결함을 경험하게 해주는 겁니다.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무섭지 않아요. 어차피 그들은 나를 통해 정결해질테니까요. 그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걱정해야 하는 거에요. 그들이 두려워해야 하는 거에요. 왜냐하면 내가 그들을 바꾸어버릴테니까요.

오늘 이야기가 바로 이걸 보여주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겁니다. 이해할 수가 없죠. 여태까지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방법이거든요. 말씀을 실천하는 전혀 새로운 방법이거든요. 율법을 지키는 전혀 다른 방법이거든요. 이전에는 부정한 여자를 구분하는 게 중요했어요. 저 여자가 나에게 오면 안 되었어요. 그런데 그가 나에게 와서 나를 만질 때까지 가만히 있어요. 아니 심지어 그가 나를 만질 수 있도록 자리를 내줘요. 왜요? 그래야 그가 정결해질 수 있거든요. 죽음, 죽음으로 인한 시체까지도 이제는 더 이상 부정하지 않아요. 더럽지 않아요. 왜요? 내가 그 죽음을 생명으로 변화시킬 꺼거든요. 그게 예수님의 방법이었다는 거에요.

지금 우리의 손은?

그리고 기억하세요. 이걸 우리에게 보여주신 이유가 뭐에요? 우리의 삶이 예수님의 삶을 따라 살아가는 거라면, 우리가 오늘 에수님의 삶을 내 삶에 반복하는 거라면, 지금 나에게 예수님의 이 능력이 있음을 기억하라는 겁니다. 예수님처럼 내가 있는 자리를 정결한 자리로 만들라는 거에요. 예전처럼 율법에 얽매어서 나를 숨기고, 감추고, 혹시나 더럽혀질까봐 조심하는, 그래서 점점 더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사람으로 만들지 말라는 거에요. 더 열심히 움직이라는 거에요. 더 적극적으로 움직이라는 거에요. 그래서 나의 정결함이 이땅을, 이 사회를,이 세상을 변화시키도록 나를 내어놓으라는 거에요. 그게 바로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의미라구요.

앞서 말씀드린 게 바로 여기에 적용되는 겁니다. 부정한 게 나쁜 거에요? 아니잖아요. 부정한 것은 부정할 뿐이에요. 자, 그럼 세상은 부정한 거에요, 나쁜 거에요? 세상도 하나님의 창조물이잖아요. 세상도 하나님의 뜻대로 변화되고, 온전해져야 하는 거잖아요? 구원받아야 하잖아요? 그렇다면 세상에게 필요한 건 부정함을 씻는거지, 절대 우리로부터 분리되거나, 단절되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는 거에요.
그러니까 우리는 이 사회로부터, 이 문화로부터, 이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어서 살아가면 안 됩니다.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라고 해서 나를 따로 떼어놓고, 기도원 들어가고, 수도원 들어가서 나 혼자 정결하게 사는 게 예수님이 원하는 삶이 아니라구요. 나 혼자 정결하고, 나 혼자 깨끗해서, 나 혼자 천국 들어가는 게 아니라구요.

내가 들어가서 정결하게 해야 하는 겁니다. 완전하게 만들어야 하는 거에요. 내가 속한 공동체, 내가 속한 모임 안에서 깨어진 관계를 온전하게 회복시켜야 하는 거에요. 죽어버린 관계를 되살려야 하는 거에요. 더럽혀지고, 왜곡된 모습을 바로 잡아야 하는 거에요. 말씀에 비추고, 복음에 비춰서, 틀어지고, 어그러진 것들을 바로잡아야 하는 거라구요. 그게 바로 우리가 삶에서 실천해야 하는 모습이라는 겁니다.

저는 이런 의미에서 교회는, 성도는 세상의 문화를 바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꼭 아무 것도 못하게 막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다 못하게 막는 건 그건 율법이 하는 행동이에요. 예수님은 그게 아니라구요. 술을 못 먹게 하는 게 아니라 술 문화를 바꾸는 거에요. 게임을 못하고, 오락을 못하게 하는 게 아니에요. 그것을 바른 모습으로 누릴 수 있게 하는 거죠. 가정의 모습, 결혼의 모습을 더 온전한 모습으로 변화시켜야 하는 거라구요.

그래요. 그리고 이걸 더 확장시킨다면, 이게 바로 빛과 소금의 역할인 거에요. 빛의 역할이 뭐에요? 어두운 곳을 밝히는 거잖아요? 어두운 곳을 변화시키는 거라구요. 어두움이 무서워서 도망다니는 게 아니라구요. 도망다녀야 해서, 내가 도망갈 길 비추라고 나를 빛이 되게 하신 게 아니라구요. 어두움이 무서워서 도망가게 만들라고 나를 빛으로 만드신 거라구요. 소금도 마찬가지에요. 썩지 않게 하는 거에요. 상하지 않게 하는 거에요. 뭐가 많이 묻고, 더러워졌던 것을 깨끗하게 만드는 거라구요. 그것을 씻어 정결하게 하는 거라구요. 그게 빛과 소금의 역할이라구요.

그래서 예수님의 방법을 영향력을 끼치는 삶인 거에요. 그들을 온전함, 정결함으로 나오게 하는 방법이에요. 생각해보세요. 못하게 하고, 떨어뜨리고, 더러운 것 묻는다고, 그 곁에는 가지도 못 하게 하는 그런 모습으로는 아무도 변화시킬 수 없어요. 나는 정결하게 남을 수 있죠. 그러나 내 곁에 그 누구도 변화시키지 못 해요. 변화는 어디서부터 시작되는 거에요? 만남에서부터 시작된다면서요? 접촉에서부터 시작된다구요.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거에요.

“그 변화의 힘을 내가 줄께. 그 변화의 능력을 내가 너에게 줄께. 이제 너는 이 능력으로 너가 있는 자리를 변화시키면 되는거야. 그게 바로 나를 따르는 제자의 삶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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