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코로나 목회 변화와 창의적 대안 | 강의 1

포스트 코로나 신학 도전과 응전 | 김회권 (숭실대학교)

 

첫 번째 우리 제목은 포스트 코로나 신학 도전과 응전이라는 제목으로, 숭실대 기독교학과 김회권 교수님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겠는데요. 숭실대에 김회권 교수님은 사실 특별한 소개가 필요 없는 한국의 대표적인 신학자이십니다. 다수의 저서를 통해서 한국교회 청년들과 교회에 하나님 나라를 위한 도전과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고 계십니다. 현재 숭실대학교 기독교학과 교수이시고, 가향교회 신학 지도목사로 섬기고 계십니다. 목사님 멀리 있지만 박수로 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Lecture 1.

아무래도 포스트 코로나 시대가 주는 하나의 큰 유익은 뉴질랜드에 있는 우리 동역자들과 디지털 공간에서 이렇게 소통할 수 있는 겁니다. 우리가 만일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살지 않는다면 여전히 지구는 중심과 주변부로 나누어졌을 텐데 지금은 디지털 시대가 지구의 중심 주변부 논리를 완전히 무력화시켰습니다. 디지털 안에는 지구의 중심과 지구의 주변이 없죠. 그래서 우리가 뉴질랜드나, 호주나, LA나, 미국이나, 유럽이나, 한국이나, 똑같은 중심에서 이렇게 일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18분 동안 발표할 분량을 이미 원고로 드렸습니다.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질의응답받을 시간이 또 18분 있다고 그래서, 발표에만 18분을 다 쓸 수가 없어서 질문 거리까지 포함해서 원고를 만들었습니다. 중간중간 읽어가면서 18분(동안 발제를) 하겠습니다.

우리는 이미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코비드-19 사태는 면대면 접촉, 다중 접촉, 그리고 밀폐된 실내공간 접촉을 회피하도록 강제합니다. 코비드-19에 대한 최대, 최선의 방역은 접촉 금지와 거리두기입니다.

기독교인은 이미 이런 코비드-19의 지배력을 승인하고 적응하고 있습니다. 대면 예배를 드리지 못한 채 거의 넉 달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언제 대면 예배를 드리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코비드-19 판데믹은 미증유의 사회변화와 소통방식에 변화를 강제하고 있습니다. 몸의 현존을 통해 만나는 살가운 대면 접촉 문명 대신에 언텍트 비접촉 디지털 공간의 가상적 접촉 문명 시대가 성큼 다가오고 있습니다. 코비드-19가 가져올 변화의 폭과 크기 범위와 강도는 당장 가늠하기가 힘듭니다. 아직도 진행 중이기 때문입니다. 코비드-19 효과는 대부분 파괴적이고, 해체적이지만, 건설적인 효과도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당장 피부에 와 닿는 변화는 부정적인 의미에서 충격적이고, 어떤 경우에는 치명적입니다. 메일 대면 접촉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는 고밀도 인구 지역인 도시 자영업자들과 몸을 매개로 하는 서비스 용역 제공자들의 생존 토대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아무리 각국 정부가 기본소득, 또는 재난 기본소득으로 정부지출을 급증한다 하더라도 누군가가 나서서 가난한 이웃들에게 생존 염려와 짐을 기꺼이 나누려는 자비심과 동정심을 발동하지 않으면 코비드-19는 인류 공동체를 사는 자와 죽는 자로 양분하며 해제시킬 것입니다.

저는 여기에 기독교가 급소를 발견했다고 봅니다. 코비드-19의 역학적 원인은 아직 모른다 하더라도 코비드-19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기회를 주시는지 직시할 수 있다고 봅니다. 코비드-19가 왜 생기는가, 역학적으로 정확한 규명을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코비드-19가 우리 인류에게 미치는 충격적인 임팩트를 바라보면서 응전하는 것은 교회의 몫이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능히 할 수 있다고 봅니다. 코비드-19는 먼저 무너지는 자와 늦게 무너지는 자, 먼저 죽는 자와 빨리 죽는 자를 양분합니다. 언뜻 보기에는 사는 자와 죽는 자를 구분하고 있습니다.

이런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먼저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면서 사회적 거리두기로 생긴 격리와 고독의 시간을 선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인간관계에 매몰되어 관계 중독, 소통 중독에 치우쳤던 지난날을 성찰하면서, 하나님과 영적 소통에 진력할 때이기도 합니다. 이 강의는 코비드-19가 초래한 미증유의 사회변화와 목양 환경 변화에 어떻게 응전할 것인지를 모색하는 시간입니다. 모든 도전적 상황에는 탈출구가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창의적 응전으로 코비드-19를 맞이한 사람들에게 새로운 목회 환경이 조성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런 낙관적인, 약간 긍정적인 관점으로 저는 봅니다.

코비드-19 판데믹이 준 충격, 그리고 새로운 진실입니다. 거리두기의 가치, 바이러스의 세계화, 위험과 불안의 세계화. 이것은 초기 2월, 3월에 세계의 모든 언론에 나왔던 주제들입니다. 올해 2월 3월 국내 및 세계 모든 언론들은 거리두기의 가치, 바이러스의 세계화, 위험과 불안한 세계화가 화두였습니다.

그다음 두 번째로 시장 체제가 모든 인류사회를 견인할 수 있다고 믿었던 신자유주의 체제의 신념이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시장은 동정심을 발동할 여지가 없습니다. 시장은 그동안 우리 사회의 척추처럼,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중요한 기둥처럼 여겨졌는데, 이 판데믹 사태로 무너지는 기층 민중에 대해서 시장이, 기업이 동정심을 발휘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민주적 통제를 받는, 국민의 세금을 받는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만이 움직입니다. 그래서 시장 체제보다 효율성이 높은 정부와 국가의 역할이 분명히 두드러지고 있습니다.

근데 더 중요한 것은 중앙정부보다 더 중요해진 지방자치단체 방역 행동(입니다). 결국은 인류 공동체는 지방자치단체적, 자율성 지방자치단체적인 효율성이 굉장히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중국의 사회과학원 교수였던 원태쥔은 최근 경향신문의 긴 칼럼에서 중국이 유럽처럼 판데믹이 폭발적으로 확산되지 않는 이유는 중국 인구 50%가 인구가 조밀하지 않은 농촌의 띄엄띄엄, 이미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하고 있기 때문에 브라질, 미국처럼, 독일처럼, 스페인처럼, 이탈리아처럼 확산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 말은 뭐냐면 인구 조밀 지역에서는, 인구의 80% 또는 70%가 대도시에 사는 우리 한국, 브라질, 미국 등이 펜데믹에 취약한 이유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지방자치단체 중에서 과밀한 도시 지방자치단체가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고, 사회적 거리두기를 이미 실천하고 있는 전원, 시골지역은 비교적 이런 판데믹에 잘 생존할 수 있다는 겁니다.

네 번째로 기업에 고용되는 임금노동자 임금으로 살 수 없는 세상. 기업이 가계의 경제를 책임질 수 있고, 기업만이 고용을 창출할 수 있다, 이것은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대한민국의 주류 경제학 80%가 주장하던 내용입니다. 그런데 기업은 재난 앞에 속수무책입니다. 기업이 고용을 창출할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은 항상 투자할 곳이 영원히 존재할 때만 기업은 고용을 창출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재난이라고 하는 비기업적 상황, 비투자적 상황이 발생하면 기업은 속수무책입니다. 다시 말해서 엉망진창이 된, 철로가 없는 수렁에 빠진 도로를 KTX가 달리는 것과 똑같습니다. 기업이라는 곳은 비투자적 환경, 재난이 인류 공동체를 초토화시킬 때는 기업의 임노동 임금으로 가게를 책임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피케티(Piketty)가 21세기 자본 3장에서 정부지출이 임금 노동의 임금보다 더 중요한 때가 오는데 그런 때를 “소셜 스테이트(Social State, 사회적 국가)”라는 말을 썼습니다. 그래서 이미 기본소득이라는 것, 즉 정부가 일률적으로 줄 수밖에 없는 시대가 올 것을 이 사람이 벌써 예언했습니다. 이런 것이 지금 우리가 교회 바깥에서 크게 벌어지는 빅 픽처입니다.

그런데 제가 섹션 2에서는 이런 거대한 전염병, 또는 흑사병, 또는 이런 돌림병이 들었을 때 교회가 효과적인 사목헌장을 내면서 신학적인 원인을 분석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중구난방입니다.

185년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가 로마 황제였을 때, 게르만과 7년, 8년간 전쟁할 때, 그때 번졌던, 그 게르만 숲 속에서 얻은 병균이 안토니오 역병인데, 이때 로마 인구의 3분의 1, 또는 4분의 1이 죽었습니다. 1918년 스페인 독감, 우리나라에서 무오 독감으로 알려졌죠, 무오 독감으로 알려진 이 독감은 우리나라 인구의 14% 정도를 죽음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그런데 옥성득 교수의 최근 칼럼 보니까 무오 독감 때 그렇게 많은 사람 죽었는데 한국 교회가 단 하나의 공식적인 문서를 내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러면 스페인 독감 때, 185년 안토니오 독감 때, 세계교회가 뭔가 효과적으로 사목적인 응답을 했습니까? 그러지 않았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이 살았던 16세기 초반, 중반도 대(大) 흑사병 또는 역병의 시대입니다. 그런데 그때 또한 사목지침 내려오거나 이것에 대해서 원인론적인 분석을 하거나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오늘 같은 판데믹이 도달하면 교회는 좌지우지되면서 오리무중 상태에 빠지면서 전혀 효과적으로 대처를 하지 못했고, 인류 공동체의 영적 제사장의 위엄을 조금도 드러내지 못했습니다 185년 안토니오 역병 때도 드러내지 못했고, 종교개혁자들의 시대 때 번졌던 흑사병, 또는 1300년대 번졌던 유라시아의 흑사병, 어떤 때도 교회가 대(大) 흑사병의 시대에 선도적 역할을 했다고, 신학적인 성명을 잘 발표하거나 신학적인 바른 길라잡이를 해주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로드니 스타크라는 사람이, 2016년에 번역된 책입니다, “기독교의 발흥”이라는 책 4장에 보면, 로마에 번졌던 역병 때 기독교인이 정성껏 간호를 해서 세계 사람들에게 로마 사람들에게 엄청난 감화를 끼쳐서 기독교 인구의 급증을, 수적 증가를 초래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런 경우는 신학적인 설명 또는 이 역병의 신학적인 설명 등을 통해서 향도 했다기보다는 역병이 가지고 온 결과에 대해서 좀 더 사랑으로 애휼심으로 책임을 지는 경우입니다. 그런데도 전도가 많이 일어났다고 그랬습니다. 이것이 아마 많은 경우에 극히 드문 사례입니다. 그런데 이런 역병 때 기독교 인구가 늘어났다는 것은 로마 기독교인들이 역병 때 역학적인 원인 조사 등을 명료하게 제시는 못했지만, 엄청난 사랑의 애휼심으로 병든 자를 돌보고, 장례식을 대신 치러주고, 이런 세상 사람들 중에서 가장 하층민들이 할 수 있는 그 일들을 교회 공동체가 맨파워를 가지고 다 감당을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기독교 위력이 드러났습니다.

오늘날 지금 한 넉 달 동안 판데믹이 한국 교회 왔는데, 한국 사회를 충격파로 몰아넣었는데, 교회가 요지부동, 복지부동입니다. 교회가 재정을 썼다는 말도 들리지 않고, 교회가, 생존 공동체를 세차게 진동하는 이런 위기 앞에 뭔가 솔선수범했다거나 헌신했다는 이런 느낌이 전혀, 그런 소식이 들려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때 말로 기독교의 발흥, 제4장, 로드니 스타크의 논리에 따르면 굉장히 기독교의 진수를 보여줄 수 있는 기회인데, 아직까지는 그러지 못한 거죠.

많은 미생물학자들이 말합니다. 전염병, 이것은 죄로 인한 것도 아니고 창조질서의 오작동 때문도 아니고, 창조질서 안에 있는 극히 많은 미생물들이 언제든지 적대적인 미생물로 바뀔 수 있으며, 미세한 창조질서의 한 일부라는 것, 이것이 하이델베르크에 마이클 벨커 교수가 “하나님의 계시 Gottesoffenbarung”라는 책에서 쓴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런 것을 죄의 문제로 바로 연결시키지 않고, 창조질서의 균형과 관련하여 원래는 순기능을 하던 바이러스도 결정적 순간에 역기능으로 바뀔 수 있는 창조질서의 내적 원리 때문에 나온다고 말함으로써 직접적으로 죄 때문은 아니더라도 창조질서 안에 있는 원리가 창조질서의 미생물적, 역학적인 힘들이 터져 나온다는 것, 구체적으로 명시적으로 죄 때문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전염병은 창궐할 수 있는 내적 잠재성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결국 뭐냐면 우리가 섣부르게 이것은 우리 죄 때문이라고 너무 이렇게까지 하지 않을 지라도, 대체로 과학자들이 미생물학자들이 또는 기호학자들이 대체로 오늘날 코비드-19를 이렇게 말합니다. 1930년대부터 발견된 이 코로나바이러스는 한 가지 특징 있는데 동물 몸에 순기능을 하며 살던 바이러스였는데, 인간의 숙주 몸으로 갈아타면서 역기능을 하고, 적대적인 바이러스로 바뀌었다. 이것이 지금 미생물학자들의 주장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동물 몸에 있는 것들이 왜 인간의 몸에 오느냐? 이것은 야생동물을 남획하고, 남용하고, 먹었기 때문에 온다는 주장이 있고, 아니면 제레미 레프킨처럼 기후변화 때문에 동물의 생태 영역과 인간의 생태 영역이 겹침으로 동물이 살고 있던 생태 영역을 인간이 침범함으로 인간이 자초한 면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이의 견해차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동물 몸에는 순기능은 하던 엄청난 미생물들이 인간의 세계로 점점 가까이 온다면 오늘날 코비드-19 같은 판데믹은 인류가 치명적으로 맞이해야 할, 우주에서 오는 어떤 소행성보다 더 무서운 재난이 된다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유발 하라리가 호모 데우스, 호모 사피엔스 통해서 그렇게 자랑했던 “기아, 전쟁, 역병은 이미 극복되었다, 기아, 전쟁, 역병은 이미 극복되고 정복된 그 무엇이다”라고 했던 낙관주의가 아주 산산조각 납니다. 유발 하라리는 지금 시치미를 뚝 되면서 자기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는 것처럼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예견하고 있지만, 사실상 오히려 연세대학교 김응빈 교수나 많은 미생물학자들의 글을 보면 미생물이야말로 우주에서 오는 소행성 또는 우주에서 오는 ET, 우주 외계인들의 침략보다 훨씬 더 리얼한 인구 멸절, 혹은 인간 문명을 중단시킬 수 있는 잠재적인 힘이라는 것을 말해 줍니다.

이런 상태에서 우리가 이제 창의적인 응전을 해야 되는데 문제는 제가 볼 때 두 가지입니다. 방역, 역학적인 응전입니다. 이거는 신학자는 할 수 없습니다. 기후 변화를 촉진시키는 이산화탄소 배출, 이것은 우리가 부분적으로 참여할 수 있지만 우리가 주도는 못 합니다. 왜냐하면 이건 우리 신학자들의 전문영역도 아니고, 목회자들이 기후변화 또는 미생물학 전공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코비드-19 같은 이런 사태가 가져오는 참혹한 현실, 이것을 극복하는 데는 교회와 신학이 이바지할 수 있습니다.

코비드-19는 산 자와 죽은 자를 분리해 놓고 있습니다. 산 자와 죽은 자를 갈라놓고 있는 이런 상황에서 기층, 가장 소득이 약한 부분, 가장 인간 중에서 연약한 자들부터 먼저 죽습니다. 지금 식량도 부족한 사람이 먼저 죽고, 기저 질환이 있는 사람이 먼저 죽고, 다시 말해서 생물학적 빈곤 차이가 극대 값으로 실행됩니다.

생물학적 빈곤 차이가 뭐냐 하면 기대수명의 급진적 차이, 영양 섭취의 급진적 차이, 질병에 취약해서 곧 치사량, 치명률, 죽음에 이르는 질병의 이런 치명적인 위력을 경험하는 그런 차이의 극대 값적 차이, 이런 것들은 기층 민중, 먹고사는 문제가 가난하고, 매일 소득이 적으면 이런 재난의 일차적 피해자가 되는데, 이 기층이 무너지면 2층도 무너진다는 이런 큰 인류의 연대성, 이런 토목공학적 원리에 대한 예리한 인식을 통하여 기층 민중이 무너지는 이 점을 교회는 인류 공동체가 무너지는 첫 붕괴 조짐으로 보고 이것을 막으려고 애쓰는 것이 목회의 중요한 주안점이 되어야 하지 않겠나 생각이 들고요(듭니다).

그동안 교회는 국민일보 같은 신문에 보면 항상 코로나 사태를 다루는 기사를 보면 대부분이 교회가 어떻게 될 것인가 그 사고방식이 완전히 교회를 중심으로 돌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거 이러면 먹고 마시는 거,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고 했는데, 교회 자신이 교회 자신의 미래만 걱정하는 것은 코로나 시대 때, 포스트 코로나 시대 때는 전혀 부적절한 패러다임입니다.

지금은 인류 공동체가 죽고 사는, 교회보다 훨씬 큰 생존 공동체, 에큐메니칼 공동체 전체의 생존과 멸망이 왔다 갔다 하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어떻게 예배 숫자를 줄이지 않을까, 재정이 어떻게 하면 축나지 않을까, 이런 식으로 교회라는 작은 이슈를 가지고 끊임없이 논란을 벌리면 세상 바깥에서 볼 때 교회는 치킨집이나 호프집을 여는 소상공인의 멘탈로 움직이는 사기업처럼 보기가 참 쉽습니다. 교회에 공공성이 완전히 사라져 버리는 겁니다.

그런데 이 판데믹 상태에서 교회가 지구공동체 모두의 제사장적인 애휼심을 가지고 자비심을 가지고, 교회 나오는 사람과 나오지 않는 사람을 구분하지 않고, 재정적으로도 돕고, 앓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모든 먼저 무너지고, 먼저 쓰러지는 사람들이 찾아가서 돕는, 이런 대제사장적 애휼심과 긍휼심을 발휘하는 것이, 전인류를 위해서 찾아가는 공세적인 선교가 중요하지, 예배당으로 오는 사람, 그것 중심으로 선교를 해선 안 되겠다는 것, 즉 지금은 지금은 재난의 현장으로 쏟아져 들어가야 하고, 정통적인 패러다임에서 돌로 된, 쇠로 된 예배당에 사람을 불러 놓고, 등록카드를 받고, 그리고 현금하면 교인, (아니면) 비교인, 이런 식으로 나누지 말고, 그런 전통적인 개념을 유지하되 훨씬 넓은 텐트를 쳐서, 지금 제도권 교회에 적을 두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사랑에 굶주리고, 하나님의 사랑의 터치, 이 돌보심에 목마른 사람들이 전부 다 잠재적으로 교회의 텐트 안에 들어온 사람이다, 그 사람이 하나님이 진짜 필요한 사람이라고 믿고 하나님이 가장 필요한 그곳으로 달려가는 교회, 이것이야말로 디지털 교회 온라인 교회 또는 가상공간에서 선교하는 교회의 정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돌로 된 예배당에 가서, 면대면 접촉하면서 등록하고, 이런 것은 좀 힘들지 몰라도, 좋은 메시지를 전하는 목사님의 설교에 접속하는 것은 아무리 교회에 반감을 가진 사람들도 어렵지 않게 초청할 수 있다고 봅니다. 온라인 교회로 사람을 데리고 오기는 쉽다는 거죠. 그러니까 지금 오프라인 교회로 사람을 데려오는 것은 반감을 일으킬지 몰라도 온라인 교회로 사람 데려오는 것은 쉽고, 그다음에 온라인 교회는 설교 횟수가 줄어들기 때문에 좋은 설교 한 번 준비해서, 혼신의 힘을 다해서 생명의 메시지, 교회 다니는 사람과 다니지 않는 사람 모두가 들을 수 있는, 결정적으로 좋은 영감 넘치는 설교를 한다면 오히려 지금 엄청난 기독교 메시지에 사람들을 노출시킬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사람들은 불안과 위기에 빠져서 누가 우리를 인도할 것인가를 찾고 있습니다. 정부지출을.. 때문에 정치지도자가 우리 목자인가. 아니면 누가 우리의 목자인가 이렇게 찾습니다. 오늘날 제가 볼 때 교회가 엄청난 그 비자금을 풀어서, 부동산을 매각해서, 가난한 사람들을 선제적으로 도왔더라면, 기독교의 본질이 뭔가를 일순간에 드러냈을 텐데 교회는 비자금을 꽁꽁 숨겨 놓고 쓰지 않고, 그 많은 재산을 쓰지 않고 있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 참 안타까운 것은 이런 코비드-19가 주는, 삶의 환경을 황폐하게 만드는 이때야말로 기독교 교회가 사회적 동정심과 자비심을 결정적으로 드러내기에 좋은 기회다, 저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온라인 공간에서 드리는 예배도 훨씬 더 미전도 족속이 가기가 쉽다는 것, 그리고 온라인 설교가 건물 안의 설교보다 또 다른 영감 있는 설교의 매개자가 될 수 있다는 것, 그다음으로 교회가 제도로서 움직이지 말고,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람과 물처럼 움직인다면, 지금 다수의 불안한 사람들에게, 전 세계 만민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겠나 싶고, 오히려 지금 우리나라의 좋은 목사님 설교는 동시통역한다면, 독일말로, 스와힐리어로, 프랑스어로, 영어로 번역된다면 이건 진짜 찬스가 왔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는 코비드-19가 왜 왔는가, 아직까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우리가 지금 이때 할 수 있는 것은 포괄적으로 동물의 몸에서 온 바이러스가 인간에게 적대적인 치명적 바이러스가 된 이 사태는 우리가 그래도 회개할 수 있고 돌이킬 수 있고 우리가 성찰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에 저는 대제사장적 기도가 회개의 일부라고 저는 봅니다. 그래서 제가 기도문을 그렇게 적어봤습니다. 여러분 모두 이 문제로 다양한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제 생각을 이 정도로 짧게 발표하겠습니다 질의응답 시간에 제가 지금 썼던 걸 중에서 발표하지 못한 것은 대답하기로 이상입니다.

 

Question 1-1.

예 교수님 감사드립니다. 정말 엄청나게 많은 원고를 준비해 주시고, 사실은 이 원고가 요약한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다시 풀어서 말씀하시면 이게 40분 만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몇 시간 말씀하실 것을 이렇게 요약해주신 것 같습니다. 두고두고 읽으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될 것 같습니다.

채팅 내용 중에 “김회권 목사님의 하나님 나라의 관점이 참 감사합니다. 최근에 수구적 기독교의 모습에 참 많이 지쳐 있는데 감사하다”(는 글이 있었습니다). 저도 목사님 말씀 들으면서, 교회가 교회 중심적인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할 기회가 되었다는 말이 가슴에 와 닿습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한국 교회가 발상의 전환을 새롭게 해야 되는 부분들이 있다면, 코로나-19로 인해서 우리가 교훈을 받아야 될 것이 있다면, 추가로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실까요?

Answer.

지금 제가 볼 때 우리 한국교회는 신문에 나지 않거나 알려지지 않은, 하나님이 보실 때 너무 좋은, 하나님과 교감하는, 숨은, 은닉된 성도들이 참 많은 것 같다고 믿고 있습니다. 근데 그들은 한국 교회를 대표하는 대표선수로 선발되지 못한 채, 저 교토 퍼플상가 2부에서 뛰고 있던 박지성 같은, 실력은 있지만 히딩크가 불러줄 때 까지는 그냥 묻혀 있는 진주입니다. 근데 저는 그런 경우가 참 많다고 보고 있고요.

그분들은 교회 재정을 쓸 때나, 성도를 대할 때나 아직까지 교회 안에 들어오지 못하는 이 세상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가 너무나 너그럽고 폭이 넓고,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그들의 특징은. 단 한 번도 교회를 위한 기도가 하나님 나라 기도보다 앞서게 강조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와 그 의는 뭡니까? 구약에서 나왔죠. 하나님 나라는 이사야 11장 1절부터 11절이 아닙니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온 세상에 가득 차게 만들어 사자와 어린양이 시온산에서 같이 공존공영하는 그런 상태, 그런 세상을 만드는 것이 하나님 나라 운동이죠.

좁은 의미로 전도는 뭐냐 하면 교회에 사람을 꽉 채우는 거, 교회에 사람을 채워서 목사가 모든 권력을 쥐고 재정, 인사권을 남용할 정도로 목사가 교황처럼 팽창하는 권력에 어쩔 줄 모르는 상태가 되는 교세 팽창은 하나님 나라가 아닙니다. 그것은 정반대로 하나님 나라의 반대입니다. 교황적인 권력으로 팽창하여 몰락하지 않은 목사가 아무도 없지 않습니까?

근데 사도적 청빈과 겸손으로 자기를 낮추는 모든 교회는 이미 그 마을과 도시에 성육신해서 하나님 나라를 구현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런 교회를 봐서 압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아직까지 희망이 훨씬 많습니다

그런데 신문에 나는 모든 사람들과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적그리스도입니다. 그들의 하나님 나라를 대적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몰려오는 양떼들을 먹여서 주님의 백성을 만드는 데 관심 있지 않고, 헌금에 관심 있고, 부동산에 관심이 있고, 재산에 관심 있고, 이런 온갖 가장 더러운 욕심, 하나님을 아는 사람 같으면 조금도 입 밖에도 내기 힘든 욕심들을 추구하는데 관심이 있지 않습니까? 그거는 시력 0.01 가진 육안으로도 보입니다.

그런데 은닉된 하나님의 백성들은 시력 5.0 정도나 되어야만 보이는 사람 눈에만 보이는 은닉된 성도들, 무릎 꿇지 않은 자들, 돈에 무릎 꿇지 않고, 돈 많은 장로들에게 무릎 꿇지 않은 목사님들, 그건 수가 엄청 적죠. 돈 많은 사람이 나타나면 어쩔 줄을 모르는 그런 목사 말고요. 선비처럼 꿋꿋하게 하나님과 교감하면서, 온 세상을 위해서 대제사장적 기도를 일삼는 그런 분들, 그런 분들이 바로 한국교회 진짜 중심이죠. 근데 그들은 언론이 다루어주지도 않고, 우리가 육안으로 볼 수가 없죠. 하나님의 눈에만 보이는 거죠. 저는 그것이 정통 2000년 교회사의 메인 기독교이고, 정통 기독교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저는 한국 교회는 정통에서 많이 멀어졌다고 봅니다. 실제로 지금 신문에 나는 모든 교회들은 대부분은 정통에서 멀어졌다고 저는 봅니다.

 

Question 1-2.

한 가지 좀 추가로 질문을 드려 봅니다. 온라인 예배에 대해서 잠깐 말씀해 주셨는데, 사실 지금까지 한국교회가 온라인으로 설교를 제공했었죠. 설교만 내보내는 것은 예배로서는 완전치 않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근데 우리가 지금 코로나-19로 인해서 한 세 달 동안 온라인으로 지금 예배를 진행하고 있지 않습니까? 온라인 예배에 대한 신학적인 것들을 교수님께서 한번 정리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Answer.

저는 지금 한국교회가 공간에 회집 된 예배를 예배의 1.0으로 생각하는 거 같아요. 근데 그것이 가장 흔한 형태이긴 하지만, 진짜 공간에, 잘 정돈된 공간에 음악도 있고, 사제도 있는 이 예배는 잘 정돈된 예배이기는 하지만 하나님과 영적으로 소통이 잘 되는 예배는 아닙니다, 그런 예배가.

예언서를 보세요. 에스겔 11장 16절 보세요.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8장 9장 11장에서 “내가 우상으로 가득 찬 이 더러운 성전을 떠나서 바벨론 난민촌 위에 가서 내 임시 성소를 펼치겠다 내가 임시 성소가 되어주겠다”, 11장 16절에요. 하나님은 돌로 된 예루살렘 성전, 그 엄청난 넓은 성전을 폐기해버리고 바벨론 포로들 한복판에 가서 메르카바, 하늘 불전차의 예배를 드리거든요.

요한계시록 1장 9절을 보세요. 요한계시록 4장 1절, 2절. 밧모섬에서는요, 주일날 주의 성령에 감동되어 나팔 소리를 들었고요, 주일날, 주의 성령이 감동된 사도 요한이 하늘 보좌가 열린 걸 보거든요

예배가 뭐냐 하면, 온라인, 오프라인은 예배를 나누는 바른 기준이 아(닙니다). 하나님 우편 보좌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교통 하느냐, 예수 그리스도의 분부를 듣느냐, 듣지 못하느냐가 예배의 핵심(입니다.) 제도권 목사님이 주도하는, 관장하는 예배가 하나님의 영을, 하나님의 분부 명령을 들을 수는 영적 감청력을 주면 그건 예배고, 안 주면은 그건 예배가 아니죠.

근데 문제는 구약 성경 어디에도 놀라운 예배는 전부 다 비정규적 상황, 다시 말해서 제도가 완비되지 않은 곳에서 많이 했어요 모든 감동적인 예배는 밧모섬에 있지요, 포로 난민촌 위에 있지요, 다니엘은 페르시아 궁중 작은 골방에서 하나님을 뜨겁게 영접했죠. 그다음에 사도 바울은 빌립보 감옥에서 하나님을 뜨겁게 찬양하고 예배했죠.

초대교회 한 번 보세요. 초대교회가 가정 예배가 50명이 넘은 예배가 있는지 보세요.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8개 교회 센터, 미션 센터는 50명짜리가 8번 되니까 다 합해서 아시아 유럽 앞에서 400명인데 그 여덟 군데 분산된 교회였거든요.

결국 뭐냐 하면 오늘날 지금 한 목사님이 불러 모아서 회집 된 예배, 그걸 예배의 모범으로 보는 것 자체가 교회사적으로 옳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런 예배보다 훨씬 비정규적 Emergency(이머전시)에 드렸던 예배가 더 은혜로 왔어요. 1954년 한경직 목사님 설교가, 전쟁 직후에 영락교회가 무너져서, 전쟁으로 무너져서 엉성할 때 드렸던 그때 설교가 얼마나 은혜로와요?

지금 여러분 엄청난 아방궁처럼 엄청나게 큰 예배당을 지어 놓고 거기서 설교가 나옵니까? 안 나옵니다. 하나님이 그런데 메시지를 둘리가 없죠. 하나님은 거대한 토목공학적 거대한 바벨탑 같은 구조물을 세워 놓고 예배드리는 데 거기에 하나님이 메시지를 위탁하지는 않습니다

(잠시 끊어짐) 그래서 저는 오늘날 교계 신문에서 예배를 자꾸 이렇게 좁게 정의하는 것을 보고서 이 땅에 신학자가 이렇게 없나 (생각합니다). 예배의 본질은 하나님 우편 보좌에 앉아계신 분에게 절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절하는 것은 유배당한 사람, 고립당한 사람, 순교 직전에 있는 사람이 예배를 드렸지, 배부르고 중산층적인 안일함에 빠져 사는 사람은 예배드릴 모드가 되질 않아요.

그래서 문제는 한국교회가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한다고 정부를 비난하고, 그거는 몰라도 한참 (모르는 거예요.) 제가 볼 때는 그거는 예배 아닙니다. 예배의 본질은 복종과 순종과 감미로운 엎드림에 있다고 저는 보거든요. 이상입니다.

 

Question 1-3.

네 교수님. 교수님 말씀을 들어보니까 코로나-19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롭게 말씀하시는 것이 많다고 느끼게 되고요. 귀한 말씀 많이 해 주셨는데,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질문을 드려야 될 것 같습니다.

아까 이 교수님 말씀하신 것 중에 역사적으로 이런 판데믹이 있었을 때 교회가 세상을 향한 대제사장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코로나-19 시대에도 마찬가지인 거 같고요. 그런 점에서 아까 말씀하실 때, 교회가 이런 판데믹 시대에 교회의 창의적 응전이 좀 필요하다, 그런 말씀을 하셨는데 창의적 충전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가 대부분 작은 교회잖아요? 지역에 있는 작은 교회들이 지역사회 안에서 어떻게 하면 창의적으로 지역 사회 안에서 어떤 창의적 대응을 할 수 있을까? 그 부분에 대해서 말씀을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Answer.

교회와 비 교회를 나누지 말고 마을에 있는 교회는 그 마을 전체를 위해서 돈을 써야 되고요, 한국 교회가 돈을 지금 신처럼 섬기니까.

이사야 38장 18절에서 24절에 보면 환난을 당했던 유다 백성들이 그럽니다. “금과 은의 우상을 향해서 이 더러운 것아, 나갈지어다. 이 불결한 것아, 나갈지어다” 하면서 금과 은을 다 쫓아내 거든요, 우상을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26절에 일곱 배, 평소보다 일곱 배 밝은 햇빛으로 치료해주시는 장면이 나오거든요.

전 한국 교회가 돈을 섬기는 우상숭배 집단이라고 봐요, 많은 경우는. 근데 이미 작은 교회는 마을을 섬기는 교회도 많고, 지역을 섬기는 작은 교회들은 그대로 계속하면 되는데, 문제는 교회가 교회 온 사람만 편의시설을 주고, 교회 안 오는 사람들을 버린 자식 취급하는 이런 차별의식이 가장 나쁜 거거든요. 지금은 환난 당한 모든 사람들,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한 사람은 전부 다 교회 백성이라고 여기고, 그들을 위해서 돈을 쓰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무리 교회가 재정이 작아도 돈 5천만 원을 마을에서 교회는 낼 수 있거든요, 비자금이 있으면요.

지금 MMF, 하이리스크 하이리턴했던 모든 펀드에 갔던 비자금들이, 언더 마켓 지하경제로 들어갔던 돈들이 빛 가운데로 나와서 이웃사랑으로 재정적으로 투신이 되면, 저는 결정적으로 교회 본질은 돈 숭배가 아니라 하나님 숭배인 것을 입증한다고 봐요. 저는 한국 교회가 딱 한 마디로 돈 숭배에 빠져 있다고 봅니다. 근데 큰 교회만 그런 거 아닙니다. 작은 교회는 그 큰 교회를 욕하면서 부러워하면서 닮아 가고 있기 때문에 모든 맘몬 숭배가 한국교회 영적인 판데믹입니다, 사실은.

그래서 재정을 십자가에 못 받는 것이 가장 현저하게 … 대제사장적인 긍휼심의 발현이라고 봅니다. 재정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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