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코로나 목회 변화와 창의적 대안 | 강의 2

포스트 코로나 사회 변화와 도전 | 도현명 (임팩트 스퀘어 대표)

 

두 번째 세션은 포스트 코로나 사회 변화와 도전이라는 제목으로 도현명 대표님께서 말씀을 해주실 것인데요, 도현명 대표님은 임팩트스퀘어라는 업체를 운영하고 계십니다. 문제는 뭐냐면 제가 임팩트스퀘어가 뭔지 몰라요. 그래서 도 대표님께서 본인에 대한 간단한 소개와 임팩트스퀘어가 어떤 일을 하는지도 조금 말씀해 주시고, 오늘 발제를 진행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Lecture 2.

안녕하세요? 저는 임팩트스퀘어라는 회사를 운영하는 도현명입니다. 임팩트스퀘어라는 회사는 뒤에서 설명을 좀 드리겠지만, 사회적 가치를 내는 기업, 사회적 기업을 컨설팅하고 투자하는 기업입니다. 그 영역에 있는 청년 한 명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거 같고요.

앞에서 교수님께서 설명해주신 것을 잘 들었는데, 제가 드릴 말씀은 어떻게 보면 좀 덜 신학적이고, 좀 덜 교회적이고, 어떻게 보면 사업의 현장, 제가 일하고 있는 그런 상황에서 지금의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어떻게 느끼고, 고백하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좀 더 편하고, 쉬운 이야기들이에요. 그래서 한번 공유를 해드리고 싶었고, 그런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이야기를 좀 준비하면서 주신 내용은 사회는 어떻게 바뀌고 있고, 또 그 바뀌는 사회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제가 조금 말랑말랑한 제목을 한번 정해 봤습니다. 물론 좀 유치할 수 있는데 제가 정해 본 제목은 “예수님이 지금 계시다면 유튜버가 되셨을 것 같다”라는 제목입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지금 같이 이곳에서 살고 계셨다면 유튜버가 되셨을 거 같다.

코로나-19의 본질은 약한 고리가 끊어지는 창수와 풍파입니다. 본질이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하고요. 어렵기 때문에 더 이상 우리가 겉으로 씌웠던 여러 가지 껍질들이 숨겨지지 못하고, 다 드러나는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이 시대에 우리가 이해해야 되는 부분들이 뭘까라는 걸 그런 교육자 분들이나, 아니면 교수님들을 제외하고도, 일반적인 평신도 저 같은 그냥 청년들, 우리 사회에 살고 있는 청년들도 고민하고 있습니다. 왜 누군가가 이 판데믹에 죽는가가 아니라, 왜 누군가가 판데믹에 너무나 극한적인 삶을 살게 되는지가 아니라, 여전히 죽어 마땅한 우리가, 지금 우리의 어떤 까닭과 우리의 어떤 의 없이 죽어 마땅한 우리가 왜 살아있는지, 우리는 왜 이 상황에서 그들과 같이 극한의 상황에 아직은 놓이지 않았는지 대해서 한편으로는 감사가 있고, 또 한편으로는 왜 살아 있는지에 대한 책임에 대한 고민을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질문하신 거 같습니다. 저희 공동체가 있는데, 그 공동체에서 이런 나눔을 하고 있는데요. 아까도 말씀해주셨듯이, 온라인으로 예배가 지속되고 있는데, “너는 나를 온라인으로도 계속 만날 수 있니? 너는 이런 상황에서 나를 예배할 수 있니? 넌 여전히 내 말이 들리고 있니? 지금 상황에서 너는 제자로 살고 있니?”, 이 질문들이 우리 청년들에게, 그리고 평신도들에게 쏟아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그것을 대답하는지는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이고, 그것들이 쌓였을 때, 결국 코로나가 지났을 때, 우리는 어떻게 훈련받았고, 또 어떤 일들을 증명해낼 수 있는 사람이 되는가에 대한 이야기로 저는 지나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간단하게 프롤로그로 세 가지 정도 이야기를 좀 공유해 드리려고 하는데요. 얼마 전에 제가 잘 알고 있는, 제가 굉장히 좋아하는 누님인데, 그분이 아동부 부장을 하고 계세요. 교회에서 아동부 부장을 하면서, (아이들을) 만날 수가 없으니까 유튜브를 열심히 찍다가 지쳐 버린 거예요. 내가 이렇게 유튜브 찍는 게 이렇게 애쓰는 게 맞나, 본질은 유튜버가 아닌데, 나는 아동부 부장이고, 아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인데, 어떻게 해야 되지? 이런 고민을 시작했(습니다).

두 번째 이야기, 한 목사님이 저희 교회 계신데, 외모가 좀 무섭게 생기셨어요. 악간 사람들이 긴장하게 만드는, 처음 만나면, 그런데 그분이 최근에 유튜브로 설교를 찍으세요. 사실 연기도 안 되고, 외모도 처음에 보면 좀 무서워서, 그렇게 나이스 하게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좀 우스꽝스러운 부분도 있고, 어색한 부분이 있죠. 그분은 꾸준히 뭔가 한 명에게라도 이 말씀을 전달해야 되는데, 강당에 서지 못하고, 거기에 사람들이 모이지 않는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이거야라고 믿으면서 그 일을 반복하십니다.

세 번째 이야기입니다. 제가 속한 영역은 기업들의 영역이에요. 저는 투자를 하고 또 그 기업들이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 기업들이 코로나-19로 난리죠. 매출을 어떻게든 방어해 보려고 애쓰고 있고, 매출이 급감하자 본인들의 자산들을 팔아가면서 요번 달을 버텨야지, 다음 달을 버텨야지, 그렇게 살아가고 있고, 고객들을 찾아가서 직접 발로 뛰면서 한 명, 한 명 설득을 시작했고, 고객들의 대응책들을, 그들이 요구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귀 기울이면서, 그들에게 대응하기 시작했습니다. 벌써 며칠째 몇 주째 야근인지 모르고, 그들의 삶은 피폐해지고 있지만, 어떻게든 이 기업들을 유지하기 위해서 애쓰고 있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저는 예수님이 지금 한국에 계셨다면 유튜브를 하셨을 것 같습니다. 사마리아 여인 한 명을 위해서 그곳까지 찾아갔던 그분이 사람들의 이해를 위해서 끊임없이 예시로 설명하셨던 그분이, 지금 코로나-19로 성도들 만나지 못한다면, 그분들이 제자를 키워내는 것이 대면적으로 불가능하다면, 그렇다고 해서 포기하실 리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한 명 씩 만날 것이고, 유튜버가 되어서라도 한 명이라도, 좀 우스꽝스러운 표현을 하더라도, 더 한 명이라도 말씀을 듣도록 노력하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말씀드렸듯이 앞에 있었던 내용을 보시면, 우리는 자꾸 어떤 거룩함에 대한 표현들이 성도들까지도 거기에 오염되어서 혹은 변질되어서 그것들이 목소리로, 어떤 옷들로, 그런 장치들로 나타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 같습니다. 저도 그런 면들이 당연히 있고요. 하지만 이 코로나-19로 인해서 더 이상 우리는 그런 멋들어진 강단 위에서 목사님을 쳐다보면서 예배드릴 수 있는 상황이 되지 못하고요. 좁은 집에서 랩탑을 하나 켜 놓고, 혹은 스마트폰으로 설교를 듣고, 예배를 드려야 되는 상황이 옵니다. 그때 오히려 우리에겐 그 질문 있다는 거죠. 예배 본질은 무엇인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일주일에 한 번씩 성전 찾아가던 우리의 삶이 찾아가지 못하게 되었을 때 바뀌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이라는 겁니다.

아까 말씀드렸던 기업은요, 그 기업이라는, 결국 돈을 벌고 먹고살려고 하는 그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서 저렇게 애씁니다. 매일매일 그 죽음 앞에서, 기업의 죽음 앞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죠. 고객들을 어떻게든 이해하려고 하고, 그들에게 어떻게든 다가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분명 그보다 귀하다는 복음을 전하고 있는 우리가 얼마나 그것들에 대해서 처절하게 애쓰고 있는가 스스로 반성해 보게 되는 시간들인 겁니다.

교회를 잘 나가지 못합니다. 저도 저희 셀 모임 나모 모임이라고 부르는데 그 모임도 하지 못한 지가 벌써 4개월째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교회를 나가지 못하고, 주일 예배를 하기 위해서 옷을 차려 입고, 그곳을 가지 못하고, 거기서 헌금을 직접 봉투에 넣어서 드리지 못하고, 그곳에서 교제를 하면서, 악수를 나누지 못하면서 우리가 어떻게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구분될 것인가에 대한 고민들이 있습니다. 어떻게든 이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마음이 없이,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 더 사랑하는 것으로 보여주지 않고, 더 희생하는 것으로 경건함을 보여주지 못하면서, 어떻게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구분되는지 더 이상 장치적으로 구분되지 않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저는 이게 바벨탑 사건 같습니다. 코로나-19로 전 세계가 하나로 합쳐졌던 그전에 상태가 유지되지 못하고, 전 세계로 흩어지고, 각자의 지역으로 흩어지고, 각자의 집으로 흩어지는 그 시대. 하나님이, 마치 우리가 너무나 너네가 교만하여져서 하나로 뭉치면 무엇이 될 것같이 여겼던,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처럼 여겼던 그 시절을 다시 흩어 버리면서, 각자의 처소에서 예배할 수 있도록, 각자의 언어로 하나님을 찾는 사람과 찾지 않는 사람들 구분될 수 있도록 하신 그 시대, 그 시대를 살고 있지 않은가 합니다.

바벨탑 사건을 나누면서 이제 청년들이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그 언어로 완전히 흩으셨을 때, 신실한 기독교인이 있었다면 그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신실한 제자가 있었다면 어떻게 살아갔을까? 저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언어가 다르더라도, 어떻게든 함께 살기 위해서, 어떻게든 우리의 마음들, 사랑하는 마음을 전하기 위해서, 억지로라도 모이고, 그림이라도 그려서 그들과 소통했겠죠.

우리에게 그렇게 본질이 드러나는 시간입니다. 지금도 우리는 억지로 모이고 있는가? 그 모임이라는 게 오프라인 모임을 말씀드리는 건 아니고요. 억지로라도 우리는 공동체 유지하기 위해서 무엇을 희생하고 있는가? 얼마나 억지를 부리고 있는가, 처절하게? 그게 우리의 본질을 드러내는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투자를 지금까지 한 25군데 정도 했습니다. 그렇게 오래된 투자자는 아니지만, 아주 액티브하게 활동하는 조직입니다. 컨설팅을 하고 있죠. 많은 기업들이 어렵기 때문에 저희한테 컨설팅을 의뢰합니다. 오프라인에서 카페나 음식점을 하는 경우에는 벌써 박살이 났고요. 실질적으로 자원 수급이 되지 않는 조직들, 행사를 진행하는 조직들은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흔들거리는 조직들이 너무나 많아요. 근데 이 상황에서 하나님 믿는 사람들이, 혹은 아직은 하나님을 믿지 않지만 그 마음에 씨앗들이 심기기 시작한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저희도 공간을 임대하고 있거든요. 물어봅니다, 회원들에게. “혹시 지금 어렵니? 어려우면 우리가 임대료를 할인하거나 임대료를 제외해줄게. 왜냐하면 네가 이 일을 계속해가면 좋겠기 때문이야.” 이미 계약된 자금 지급이 있으면 그 자금지급을 서둘러서 먼저 지급하려고 합니다. 그 지급들로 인해서 그 사업이 좀 더 오랫동안 유지되었으면 좋겠거든요. 그 친구들이 우리 주변에 있었으면 좋겠고, 그 친구들이 여전히 이 생태계에서 함께 했으면 좋겠거든요. 소액 긴급 대출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고요, 저희도 저희의 여유되는 상황에서 다른 이들에게, 다른 사업을 하는 이들에게 긴급하게 대출을 해주고 있습니다. 유치원 휴원이나 초등학교 개학이 연기되면 돌봄을 제공하는 소셜벤처들이 빠르게 각자의 서비스를 할인해서 내어놓으면서, 그 일들을 감당해 내기 시작합니다. 회사들이 선언합니다. “아이를 데리고 오십시오. 아이들이 여기서 떠들더라도 우리는 용인하겠습니다. 용납하겠습니다. 왜냐면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이 어려운 상황에 당신이 힘들어하거나, 이 회사 떠나는 것보다 회사가 시끄러운 게 우리에게 훨씬 더 낮기 때문입니다.” 지역의 방역을 위해서 우리는 봉사를 합니다. 돌아다니면서 소독제를 뿌리기 시작하죠. 사람들에게 손을 씻자고 이야기하고, 마스크를 나눠주기 시작합니다. 이 위기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십시일반으로 기금을 마련하고, 그 기금이 그들에게 돌아갈 수 있도록 노력합니다.

우리가 굉장히 풍족하게 때문에 이런 일을 하는 건 아닙니다. 우리도 여전히 성장하는 조직이고, 때문에 항상 돈은 부족하고, 사람이 부족하고, 시간은 쪼개어 쓰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일을 해야 될까요? 왜 이런 일을 이들은, 아무도 거기에 대해서 요구하지 않고, 아까 앞에서 교수님 말씀하셨던 것처럼, 아무도 조명해 주지 않고, 신문에도 나지 않는데 왜 이 일을 하고 있을까요? 저는 소셜벤처란 영역이, 사회적 기업이란 영역이 이미 긍휼한 마음을 갖고 시작한 비즈니스맨들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소셜벤처 대표들은요, 저희 영역에 모여있는 30% 정도가 기독교인들이거나 교회를 다녀봤던 사람들입니다. 전체 청년 중에 기독교인의 비율을 생각했을 때, 굉장히 높은 비율입니다. 매주 수요일마다 저희는 지역 신우회를 드리는데, 많을 경우에 40~50명씩 모여서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그들의 바쁨과 분주함을 생각했을 때, 굉장히 많은 숫자죠.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지냐 하면, 그리스인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이 충분히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변화를 시작합니다. 전염병 자체가 굉장히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하는 문제구나 생각하고, 소셜벤처 중에는 이런 전염병의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기 위해서 노력하는 회사들이 시작되었습니다. 단순히 당장 어떤 것들을, 어려움들을 풀어주자가 아니라, 장기적으로 다시 일들이 시작될 것이고, 또다시 제2의 코로나가 올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그걸 막아내고, 예방하고, 그것들에 대한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솔루션을 제공할 필요가 있다. 이게 소셜벤처들의 움직임입니다. 노을이라는 소셜 벤처기업이 있습니다. 말라리아 등의 혈액을 뽑아서 큰 병원에서 시약으로 진단하는 그런 게 현재의 상황이라면, 우리는 굉장히 작은 기기로, 아주 혁신적으로 15분에서 20분 정도면 이것은 말라리아 A형이다, 때문에 이런 약을 처방해야 된다라는 결론을 내려주는 AI 진단기기입니다. 대표들이 리더십들이 다 기독교인들인들인데요. 이들은 코로나로 시작되었던 이 판데믹이 제2, 제3의 것들로 올 거라고 기대하고, 그것들을 예상하고, 거기에 적합한 솔루션을 만들기 위해서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미래지향적인 도전들이 우리에게 시작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죠. 언제나 어느 시대에나 재난과 재양들은 그치지 않았습니다. 단지 그것이 얼마나 준비되어 있는지, 그에 대한 마음들을 우리가 얼마나 쌓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지, 재난이 끊긴 적은 한 번도 없다는 것이죠.

두 번째는 재난상황에서 우리는 확인하게 됐죠. 가장 큰 피해를 입는 그룹은 가장 소외된 이들입니다. 가장 약한 고리들이 먼저 끊어지더라고요. 그들의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그들을 어떻게 섬겨낼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겁니다. 저희 아들이 여덟 살입니다. 초등학교를 이제 막 입학하는 나이인데, 학교를 제대로 가보지 못하고 개학을 했죠.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지금 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남은 시간들을 어떻게 하느냐, 랩탑이나 컴퓨터를 활용해서 수업을 들어야 됩니다. 문제가 있죠. 저희는 괜찮은데요, 랩탑이 없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디지털기기가 없는 친구들이 있어요. 부모가 스마트폰을 아이에게 빌려줄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아이들을 어떻게 해야 될까요?

이 약한 고래들이 여전히 우리나라 존재하는데, G11이다, G12다 떠들고 있지만, 여전히 무너진 곳들, 여전히 소외된 곳들, 지금 당장 이번 주를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고민하는 곳도 있는데, 판데믹 때문에 각자의 삶에 매몰되어서 도리어 그들이 보이지 않는 상황들, 여기서 소셜 벤처들 사회적 기업들이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무엇을 나눌까, 없는 중에서도 그 두 렙돈을 어떻게 내놓을까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쓰고 있는 기기 중에 지금 안 쓰고 있는 기계가 있다면, 그것들을 모아서 지금 기부하고 있고요. 천연비누를 만드는 한 소셜벤처는, 저희가 투자한 곳인데, 창고에 있는 모든 비누를 다 꺼내서 대구에 기부했습니다. 그들은 지금 팔 것이 없어서 팔지 못 해요. 매출은 급감하겠죠. 하지만 이게 비누를 만든 이유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물론 모두가 이렇게 살고 있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이런 고민들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고, 이런 고민을 실천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 청년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도 분명합니다. 저들 중에 그리스도인도 있고, 그리스도인이 아닌 선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구분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하나님이 질문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치의 본질을 요구받고 있는 상황인데, 우리는 정체성으로 대답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정체성으로 응답하지 않으면, 도대체 무엇으로 이 상황을 응답하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의 삶도 코로나-19로 굉장히 많이 바뀌었습니다. 교회 공동체도 노력하고 있고, 작은 교회들이 임대료가 걱정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회적 기업의 다른 사회적 기업을 위하는 것만큼, 큰 교회가 작은 교회를 위하고 있습니까? 정말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을까요? 없는 것들에서 내놓은 것들이 사회적 기업이 내놓는 것만큼 우리는 교회끼리의 공동체 의식을 갖고 있습니까? 성도의 입장에서 볼 때 그렇지 않은 거 같습니다. 제가 다니고 있는 교회가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큰 교회거든요. 돈을 모아서 많은 교회를 섬기고 있고, 그들의 임대료를 대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좀 더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희 교회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한다는 거죠. 좀 더 나은 것에 대한 사모함과 그것에 대한 기대가 지금 시간이기 때문에 충분히 내어 놓을 수 있는 이유가 됩니다. 물론 많이 하고 있지만요.

인내와 헌신, 올바른 초점에 대한 확인, 죽음이 실제라는 재인식, 이런 것들이 청년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죽음이, 예전에는, 예수님 시대에는 30~40대가 평균 수명이었다면, 지금 90세가 넘어가는 평균 수명 속에서, 20-30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에게 죽음은 실제가 아닙니다. 미래의 어떤 것들이에요. 부모님도 건강하시고, 우리 주변에 죽는 사람이 없거든요. 그들에게 처음 죽음이 실제라는 재인식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죽을 수 있구나. 죽음이 존재하는구나. 나도 죽을 수 있구나. 그리고 서로 떨어져 있기 때문에 연결되어 있었다는 공동체가 무엇인지에 대한 자각이 일어나고, 환경과 사회 문제에 대한 경각심이 일어나고요.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구나라는 겸손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 시기를 그리스도인처럼 살아낸다면, 그런 마음들이 들어야 한다는 것이죠.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도, 도리어 그 기반이 드러나는 삶이 하나님 앞에서 의미 있는 삶이 될 수 있는 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과거의 흑사병이 유럽의 큰 상처를 남긴 뒤에 우리는 “갓 블레스 유”라는 인사 하나를 얻었습니다. 그 뜻이 왜 생겼는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는 모르지만, 재채기를 하는 사람마다 우리는 “갓 블레스 유”라고, 하나님이 너를 축복하길 기대한다면서 축복을 빌어주기 시작했죠. 우리는 코로나가 지나간 다음에 무엇을 남길까요? 저런 인사라도 하나 남길 수 있을까요? 상처만 남기고 끝나는 거 아닐까라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저는 얼마 전에 바로 어제 있었던 일이죠. 청년들과 함께 나누면서, 작은 모임을 하면서, 마지막 고백을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하박국과 같은 마음이죠. 하박국의 마지막은 기쁨으로 끝납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하박국 3:17~18)

지금 이 시대의 청년들에게 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특별한 은혜가 있습니다. 그 은혜가 이 어려움들 중에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이 어려움 중에 깨달아지고, 어려움 중에 미래를 대비할 수 있고, 이 어려움 중에 오히려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여기 계신, 이것을 같이 하고 있는 많은 교역자분들께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이 시기가 극복해야 될 시기가 분명합니다만, 그것이 아니야 도려 회복해야 될 시기, 도리어 청년들을 다시 이 자리를 끌어올 시기, 어떻게 코로나가 지나면 어떻게 청년들 다시 데리고 올 것인가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 그들이 힘들어하고 있는 이 시간에 어떻게 하면 청년들의 그 고민을 함께 할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삶의 현장 속에서 회복과 예배가 일어날 수 있게, 질문하시고 계신, 하나님이 질문하고 계시는 너는 이 상황에서도 나를 예배할 수 있니?, 지금도 온라인으로 나를 만날 수 있니?라는 질문에 응답할 수 있는 청년들을 만들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것들에 대한 도움을 요청드리면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Question 2-1.

도 대표님이 말씀을 들으면서 많이 느낀 것이, 우리는 이런 문제가 생겼을 때 목회자의 입장에서 생각이 되거든요. 도 대표님이 말씀을 드리면서 그것이 아니라, 이 삶 속에서, 현장에서 살아가는 우리 크리스천들, 교인들에 입장에서 이런 문제를 좀 바라보고, 생각해 봐야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양한 질문들을 좀 올려 주셨네요. 몇 가지 종합에서 한번 좀 말씀을 드린다면, 제가 봤을 때 50대 이상의, 그러니까 집토끼라고 할 수 있는 기존의 나이 든 세대는 이것 때문에 본인의 정체성이라든지 이런 것이 그렇게 바뀔 것 같지는 않아요. 그러나 제가 볼 때 청년 세대는 이런 시점에 교회와 기독교 신앙에 대해 성찰할 수 있는 계기라고 저는 생각이 들고요. 또 대표님께서도 청년의 입장에서 말씀을 많이 해 주셨는데, 그렇다면 이 시대의 기독청년들, 혹은 기독교인이 아닌, 이 세상의 모든 청년들을 위해서 교회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이들에게 다가가야 될지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Answer.

청년들의 입장을 제가 대변하기에는 청년들 중에서 제가 가장 나이가 많은 축이어서요 그렇기는 합니다만, 저희가 청년들을 섬기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아까 말씀드렸던 임팩트스퀘어에는 산하에 쉼 센터라는 센터가 있어서 기독청년, 사회적 기업가를 육성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그들을 소명에 대해서 고민을 하게 하고, 훈련을 시키고, 사회적 기업을 창업하더라도 그 본질적인 신앙의 부르심을 잊지 않을 수 있도록 같이 돕고 있는데요. 그런 관점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친구들이, 지금 살아가고 있는 시대는 말씀하신 것처럼 50대, 60대, 저희 부모님 세대가 살아가시는 시대와 다릅니다. 가장 큰 차이점은 이 친구들은 태어나서 교회가 더 커졌던 시절을 경험해 본 적이 없습니다. 이 친구들은 태어나서 정신을 차리는 성인 시절은 항상 교회는 줄어들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기독교가 줄어들고 있었다는 겁니다. 이들에게 부흥이라는 것은 양적인 부흥이 아니라, 원래부터 본질적으로 질적인 부흥입니다. 한 달에 한 번 나오던 친구가 두 번 나오게 하는 것, 좀 더 신앙이 수준이 높아져서 감당할 수 있는 역량들과 감당할 수 있는 깊이가 늘어나는 것, 그렇게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때문에 목사님들이 설교하시는 부흥이나 목사님이 설교하시는 예배나 이런 개념들이 청년들, 특히 지금 20대나 30대 초반들이 생각하는 예배나 부흥과는 전혀 다른 경우가 많이 있고요.

그래서 청년들이 저희한테 이런 상담을 최근에 많이 합니다. 목사님들이 기도하시면서 코로나 이전의 시대로 회복시켜 달라는 데 그렇게 될 거 같지 않다는 겁니다. 코로나 이전에 시대로 돌아갈 거 같지 않다는 거예요. 우리는 코로나를 겪었고, 이미 제 아들 같은 아주 어린 친구들은 마스크를 쓰고 있는 것이 너무나 익숙해서, 마스크를 쓰면서 외부 생활 생각하기 때문에 마스크를 전혀 쓰지 않는 시대를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싶을 정도의 익숙함을 보이고 있다는 겁니다.

지금 막 청년들 중에 하나님을 알게 된 친구들은 온라인 예배를 드리는 그 과정에 너무나 익숙해지기 시작했어요. 왜냐하면 학교 강의든, 아니면 미팅은 하는 것이든 다 온라인으로 바뀌기 시작했거든요. 그들이 좀 더 이런 상황, 바뀌어진 상황 속에서 어떻게 신앙을 쌓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 도와주셔야 됩니다.

그 채팅창에도 쓰셨지만, 온라인 예배나 이런 부분들은 적절하긴 하지만, 열정을 잃어버리는 습성이 생기지 않을까, 저는 여기에 굉장히 동의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라인으로 그 습성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한 겁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소그룹 활동을 여전히 온라인으로 할 수 있고, 여전히 우리가 게을러질 수 있고, 대면하지 않았을 때 생길 수 있는 부작용들을 만회하면서 온라인 예배를 드리도록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온라인 예배는 어렵기 때문에, 안 되기 때문에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청년들은 이미 여기에 익숙해지기 시작했거든요. 그들에게 더 나은 열정을 제공해 주는 방법 필요하다는 거죠. 그 고민들이 좀 제시되고, 함께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Question 2-2.

지금 말씀하신 것 중에 지금의 청년 세대들은 양적 성장을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다, 중요한 지적 같고요. 그런 점에서 이들에게는 질적 부흥이 중요하고, 또 질문에서도 다행히 지금 올라오고 있는데, 사회적 책임, 이런 것들이 질적 성장하고 관련되는 부분이라고 보고요.

앞에서 이제 그거 관련해서, 아까 조금 전에 이제 대표님께서 마지막에 말씀하셨는데, 오프라인 예배를 정말 무시하는 건 아니고요. 앞으로의 시대는 오프라인 예배, 온라인 예배가 같이 가야 할 텐데, 현장 목회자들 입장에서는 사회적 거리두기가 강화되는 시점에서는 온라인 예배가 어쩔 수 없이 일정기간은 좀 더 지속되고 강화될 필요성이 있잖아요?

그럴 때 걱정하는 게 게으름, 혹은 사람도 어느 정도는 습관의 어떤 동물이기 때문에 정기적으로 교회를 출석하다가 이와 같이 교회를 멀리하는 기간이 길어지면 코이노니아나 공동체의 특성상 오프라인 모임도 그만큼 중요하잖아요? 자 그렇다면, 이런 온라인 예배가 장점도 있지만, 게으름을 유발할 수 있다는 단점도 있을 수 있는데, 그런 관점에서 봤을 때 온라인 예배가 조금 더 보완해야 할 점이 있다면, 예배를 드리는 자에 입장에서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Answer.

온라인 예배 단점이 꽤 있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더 수동적이 될 수도 있고요, 그러다 보면 게으름이 굉장히 강해질 수도 있죠. 장점도 있습니다. 장점은 온라인에서 인터렉티브 하게 하는 것들에, 만약에 설교에서 설교의 오프라인 예배에서 설교를 듣다가 거기에 궁금함이 생겼을 때, 혹은 질문 생겼을 때, 사실 예배 중에 질문하는 경우가 일반 교회에서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온라인 예배가 활성화된다면, 거기서 많은 의견들과 그럼 문의들이 이어질 수 있는 구조가 생길 수도 있다는 거죠. 저는 온라인 예배 단점을 보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장점을 강화하는 게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소수의 친밀한 공동체를 만드는 게 결국 교회에 중요한 사명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대중 예배는 점점 더 여러 가지 이유로, 이제는 조금만 무슨 문제가 생겨도 바로 제제가 되고, 어려움이 생길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꼭 2,000명, 3,000명이 모여야 더 경건한 예배가 아니기 때문에, 소수의 친밀한 공동체들이 구성될 수 있는 것들, 그래서 그것은 오프라인으로 절대로 대체될 수 없는 어떤 것들이라는 걸 경험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줘야 된다는 생각입니다.

과거에는 그것이 성경공부 모임이기도 했고, 제자 양육의 모임이기도 했고, 최근에는 셀 모임이나, 여러 가지 모임들이 형태로 구성되고 있지만, 그것의 본질은 결국 서로가 서로를 깊이 있게 섬기고, 삶을 공유할 수 있을 수준의, 자신의 것을 내어 놓고, 기도를 부탁하고, 어려움을 서로가 나눌 수 있을 정도의, 그런 친밀한 소수의 공동체를 만드는 작업들, 그런 작업들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Question 2-3.

아까 우리 발제해 주실 때, 정말 기가 막힌 말씀을 하나 해 주셨는데, 코로나가 새로운 바벨탑일 수 있다. 제가 이것을 신학적으로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요즘 방송을 보면서 상당히 무슨 “느님”이라고, 연예인이나 어떤 전문가들은 무슨 느님, 그런 말 되게 많이 쓰더라고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저는 거부감이 들어요. 사람을 하나님과 같은 경지에 두는, 우리 속의 그런 마음이 자연스럽게 표현되는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하기도 했거든요. 오늘 이 시대의 사람들이 인간을 거의 신격화하는 욕망을 하나님께서 이런 것을 통해서 깨버리시는 것이 아닌가, 아까 말씀하시는 것을 통해서 그런 느낌을 받게 됐어요.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이러한 욕망이 모이는 것을 흩으시는 것이 오늘의 과정이라면, 우리가 흩어져서 다양한 소그룹 활동을 통해 어떤 새로운 모임들을 만들어 가야 되잖아요? 이런 소그룹 모임은 온라인이 될 수도 있고, 또 오프라인이 될 수도 있고, 살아서 생동하는 그런 소그룹 모임들이 교회가 많이 만들어야 될 거 같은데, 그러면 현실적인 문제로 소그룹을 누가 지도할 것이냐, 소그룹 지도자는 어떻게 훈련시킬 것인가, 다양한 현실적인 문제가 발생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이 돼요.

그래서 앞으로 시대의 온오프라인의 전문적인, 혹은 다양한 연령대, 혹은 다양한 관심, 이런 것을 통해서 다양한 소그룹, 전인적인 소그룹들이 만들어져야 된다면, 오늘의 시대에 필요한 여러 소그룹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교회가 어떤데 집중해야 되고, 또 필요하다면 재정적인 부분에 대해서 어떤 걸 투자해야 되는지, 평신도 입장에서 좀 한번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Answer.

다른 맥락에서 한번 시작을 하면요, 저희 그 청년들이 갖고 있는 하나의 특성 중에 하나는, 물론 교회 중심이지만, 일과 삶과 영성의 일치에 대한 고민을 굉장히 많이 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과거에는 교회가 상당히 존경받았고 성장하는 과정 중에 있었기 때문에 세상 속에서 이것이, 물론 첨예한 대립도 있었지만 동시에 어느 정도 인정도 있었던 거 같은데요. 지금은 아시다시피 본인이 기독교인이면서 기독교임을 얘기하지 않는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그것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죠. 사회에서도 저희 지역의 한 2,500명 정도의 청년이 있는데, 그중에 기독교인들이 한 20%~30% 정도 됩니다. 근데 그 기독교인 중에 절반 정도는 본인이 기독교인인 것을 회사에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얘기해 봤자 좋은 게 없기 때문이죠.

저는 그런 소규모의 공동체들이 교회 안에서도 만들어져야 하지만, 교회 바깥에서 어떻게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한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일과 삶과 영성의 일치라는 것은 어떤 곳에서든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되어지고, 또 주일 만이 아니라, 평일 중에서도 평일 교회들이 필요한 것이죠. 교회 중심이라는 것은 여전히 바뀌지 않지만, 그 교회가 건물 교회로서의 교회가 아니라 실제로 예배드리는 둘셋이 모여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계시는 그 영역, 예배드릴 수 있는 그 처소가 교회가 되는 일들이 청년들의 삶 속에서 벌어지는 게 필요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사실 리더가 세워지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고요. 리더들이 교회 안에서의 리더뿐만 아니라 본인이 활동하고 있는 그 사역의 현장 안에서의 리더들로 세워질 필요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 모임에서 공유할 수 있는 것이 굉장히 다릅니다. 교회 내에서 공유할 수 있는 건, 같은 예배를 드리고 같은 설교를 듣는 사람으로서의 공감이 있다면, 그 삶의 현장 속에서는 같은 일을 하고 있는 사람과의 공감이 있고, 같은 일 속에서 의 곤란함과 갈등들을 겪고 있는 사람들로써의 공감이 굉장히 크거든요. 그 부분들에 대한 예배들, 공동체들을 구성하는 데 좀 더 방법들이 필요하다, 그런 리더들을 키워내는 것이 굉장히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Question 2-4.

한 가지만 좀 더 질문을 해본다면요, 아까 이제 발제에서 말씀하셨던 이런 온라인 환경은 청년, 젊은 세대에게는 굉장히 익숙한 환경이지만, 교회의 중심축이라고 할 수 있는 50대 이상, 그래도 사실 50대는 그래도 좀 괜찮은 거 같고요, 고연령자라고 할 수 있는 60대 이상 분들에게는 어려운 환경임에는 틀림이 없거든요.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이분들을 안 데리고 갈 순 없잖아요?

그렇다면 조금 현실적인 문제로, 이런 온라인 환경이 어렵고, 접근하기 어려운 노인세대를 위해서는 우리 젊은이들이 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있을지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Answer.

제가 가까운 목사님들께 이런 이야기를 자주 나누는데 방금 말씀 주신 것처럼 그런 질문들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해야 되냐, 나는 60대 목회자인데 여기에 적응하기가 너무 어렵다.

저는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모두가 지금 잘 나가는 유튜버처럼 해야 된다는 얘기가 아니라, 그런 애를 써야 된다는 데에 공통점을 말씀드린 것이고요, 듣는 사람들도 다 청년이더라도, 원하는 방식, 익숙한 방식이 다 다릅니다. 결국에는 그들이 받아야 되는 그 말씀의 어떤 색깔, 또 각자가 쉽게 그것들이 들어갈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는 마음밭이 조금씩 차이가 있기 때문에, 어떤 목회자가 어떤 방식으로 설교를 하고, 예배를 인도하는지와 상관없이 그분들이 좀 더 애써 주시길, 여기에 맞는 방식으로 고민하시고, 또 거기에 맞는 방식으로 고민하시고, 거기에 맞는 방식으로 전달해 주시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말씀드린 것이고요.

또 이것에 대해서 젊은 청년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마음이 있지만, 그것을 전하는데 대해서 어려움을 갖고 있는 경우에 청년세대에게 어떤 부분이 좀 더 개선되어야 하는지, 혹은 어떤 포인트들이 필요한지에 대해서 좀 더 인터렉티브 하게 접근해 주실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고요.

그리고 사실 저는 조금 이런 생각을 합니다. 저희 부모님도 그렇고, 저희 장인어른도 그렇고, 연세가 지금 거의 칠순이 다 되시는데, 그런 분들도 유튜브를 한번 익숙해지면 굉장히 잘 쓰십니다. 물론 찍는 것을 잘한다는 게 아니라 들으신다는 겁니다. 그러면 지금 연세가 있는 목회자 분들의 이야기들과 설교를 하시고, 예배를 인도하시는 내용들이 그 세대들에게 맞게 잘 전달될 수 있는 구조로 형성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 부분들이 기능적인 불편함보다는 익숙하지 않은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려움이 아니라 충분히 익숙하지 않아서 많이 써 보지 않아서 생기는 거고, 그 경험이 축적되는 상황이 있다면 충분히 각자의 상황에 맞게, 각자의 모습에 맞게 활용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요. 그 정도면 충분히 지금 필요한 시대의 중요한 솔루션으로서 활동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Outro

감사합니다. 말씀하신 건 조금 덧붙인다면, 아이패드가 나와서 처음 활성화될 때 실제로 아이패드를 가장 많이 잘 사용하는 세대가 노인세대라는 통계도 있었거든요. 지금 말씀하시는 것을 생각해 보니까 접근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필요한 기기가 없어서 그럴 수도 있고요, 값 비싼 고가의 기기가 아니라고 아니더라도 저렴하게 사용할 수 있는 그런 모바일 기기들이 많이 있잖아요. 우리가 안 쓰는 전화기 같은 것들도 많이 있고요.

그래서 이게 필요하다면,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도 학교가 모바일 기기를 나누어주어서 애들에게 e강의실에 접속하게 하는 것처럼, 교회가 필요하다면 그런 안 쓰는 스마트기기 같은 것들은 모아서 필요한 분들에게 나눠 주는, 그래서 예배 참여하게 하는 그런 것도 좀 필요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도 대표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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